[정책 연구과제] 왕이 만든 세계의 신도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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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수원시정연구원 조회수 : 7,952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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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 | 수원학연구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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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책임 | 최성환 연구위원 |
연구진 | 이영림, 박지배, 이훈, 한동수, 피수경 |
보고서 번호 | SRI-기획-2016-04 |
연구요약 | 기획과제 |
발행일 | 2016-12-31 |
연구리포트
-수원학연구센터 최성환 센터장-
1. 세계 속의 수원 화성
정조가 만든 수원 화성은 조선사나 수원지역사의 맥락에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후기 문명의 수준이 서양이나 중국의 첨단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조선 역시 세계사적 추세와 호흡하면서 국가의 중흥을 위한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것의 성공과 실패 여부를 따져보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처한 국가와 사회를 세계의 수준에 맞게 향상시키려는 노력 그 자체를 평가해 주는 일이다. 우리는 수원 화성에서 세계와 호흡하고자 노력했던 조선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정조대와 비슷한 시기에 건설된 동·서양 주요 신도시들을 둘러보아야 한다.
17-18세기는 세계 각국에서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의 형성과 부국강병이라는 시대적 요구가 당면한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는 군주가 주도하여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는 방향으로 표상되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러시아 표트르 대제의 페테르부르크, 강희제와 건륭제의 승덕(承德), 정조의 화성(華城)이 있다.
물론 신도시들이 건설되고 운영되는 구체적 모습은 각국이 처한 상황과 이에 대한 국왕의 인식에 따라 각각 다르게 나타났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국왕의 개인적인 경험과 사회‧문화적 맥락 등을 고려하여 신도시 건설의 실제를 다각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태양 왕의 새로운 우주, 베르사유
오늘날 베르사유 성과 베르사유 시는 분리되었지만, 베르사유의 정체성은 여전히 부르봉 왕조의 국왕 도시라는 강력한 이미지로 가득하다. 수도 파리에 거주하던 귀족들의 반란에 시달리던 루이 14세는 황량하던 늪지대와 벌판에 흙을 퍼붓고 물을 끌어들여 거대한 질서와 완벽한 조화의 정원과 궁궐을 갖춘 베르사유 성을 건설하였다. 1661년에 시작된 이 공사는 루이 14세의 증손인 루이 15세가 사망한 1774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이후 베르사유 성과 시는 부르봉 왕가의 흥망과 부침을 같이하였다.
1682년 5월, 루이 14세가 궁정을 옮기면서 베르사유 성은 프랑스의 정치 중심지가 되었고, 수많은 귀족들과 관리들이 이주하면서 베르사유 시도 부흥하였다. 그러나 1789년에 프랑스 혁명으로 궁전의 기능이 상실되면서, 베르사유 성과 시의 위상도 추락하였다. 1790년에 베르사유 시가 도청소재지로 선정되면서‘행정도시’로서 정체성을 재정립하게 된다. 이로써 왕의 궁전은 국민의 궁전으로 바뀌었고, 파리와 베르사유를 연결하는 철도가 불설되면서 베르사유 시의 관광업과 상업은 성장하게 되었다.
그림1 정원쪽에서 바라본 베르사유 시 Ⓒwikimedia Commons
3. 서구를 향한 러시아의 왕도, 페테르부르크
표트르 대제는 서유럽의 문화를 동경하던 러시아의 차르였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북서 변방의 열악안 늪지대에 ‘황제의 도시’인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고 제국 러시아의 수도로 삼았다.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의 부국강병의 이상이 현실로 반영된 공간이었다.
당대의 현실에서 표트르의 개혁은 불가피하였으나, 너무나도 급진적이었고 강압적이었다. 그 과정에서도 무수한 농민, 상민, 변화에 뒤쳐진 일부 귀족들의 고통과 희생이 뒤따랐다. 또한 페테르부르크의 서구화는 러시아 귀족들만의 서구화였다. 따라서 귀족들만의 국가가 되면서 농민 대중은 철저히 배제되고 점차 이질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림2 페테르부르크의 주요 요새들
4. 청 제국 북방의 정치중심지, 승덕(承德)
승덕은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청 제국의 정치적 목적을 수행하는 비공식 수도였다. 청조는 만주족이 세운 왕조로 건륭제는 만주족의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여름철이면 승덕 인근의 무란위장에서 대규모의 수렵을 행하였다. 강희제는 제국을 경영하기 위하여 적대자이자 동맹자인 몽골 지역의 여러 부족들에 대한 지배 및 연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승덕을 활용하였던 것이다.
강희제 이후 가경제까지 청의 황제들은 피서산장에서 몽고 왕공들을 접견한 후에, 그들이 이끌고 온 수렵단과 함께 무란위장에 가서 수렵을 하고 잔치를 벌이고 씨름을 하며 친목을 도모하였다. 피서산장과 무란위장에서 벌어진 황제의 제반 행사와 활동은 몽고를 제어하고 그들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하는 핵심 기제였다. 100여 년의 시간 동안 승덕은 행궁으로서 그 기능이 계속 증대되어 청 제국이 포괄하는 모든 민족에 대한 지배를 확인하고 연대를 강화하는 정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림3 승덕의 피서산장과 외팔문
5. 상왕의 별경(別京), 수원 화성(華城)
화성은 정조의 원대한 구상과 이를 잘 받들었던 개혁 신료들이 합심하여 건설한 도시로서, 특히 조선의 수도인 한양과의 관계에 주목하여 그 위상을 이해해야 한다. 수원을 도호부에서 화성 유수부로 승격하는 조치는 정조 17년에 공식적으로 선포되었고, 이후에도 수원 화성은 그 위상을 유지했다. 그러나 정조의 구상을 면밀히 살펴보면, 화성은 단순히 ‘유수부=배도(陪都)’가 아니라 ‘별경(別京)=화경(華京)’의 구상으로서 건설되었다.
화성 건설은 단순히 왕권 강화를 위해 추진된 것은 아니었다. 정조는 갑자년 상왕(上王) 구상에 따라 조선 왕조의 중흥을 위해 상왕이 주도하는 정치‧사회 개혁의 모범 도시이자 정치 실험장으로서 화성을 건립하였다. 이를 위한 공적 과제로서 화성에서는 부국강병과 부민을 위한 군사 개혁, 첨단 기술의 도입, 상공업 진흥책 등이 전격 시행되었다. 오늘날 화성의 각종 건축물과 도시 기반 시설은 그 산물이다. 그러나 정조 사후에 세도정권의 반동으로 인하여 이러한 구상은 공식화되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으며, 그 결과 화성은 강화·개성·광주와 같은 유수부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그림4 수원 화성의 주요 공간 구성
이상에서 살펴본 17-18세기 동서양 각국의 도시들은 모두 집권적인 국가 권력이 확대‧관철되는 시기에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군주에 의해 건설된 신도시였다. 이 도시들은 모두 수도 혹은 그에 버금가는 역할을 하였다. 베르사유는 유럽 각국 수도 건설의 표준 모델을 제시하였고,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귀족들이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는 창구의 역할에 걸맞게 다채로운 서유럽 건축 양식을 한 눈에 보여주었으며, 승덕은 황제의 피서산장과 외팔묘를 비롯한 30여 개의 사원이 청 제국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원 역시 화성과 행궁 및 서호의 수리 등 조선후기 당대의 도시들과는 사뭇 다른 도시 시설물들이 정조의 부국강병 구상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들 네 도시에 새롭게 나타난 경관들은 오늘날까지 훌륭한 관광 자원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관을 도시의 관광 자원 차원에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곳에는 당대 최고의 군주들이 꿈꾸었던 이상, 즉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하여 도시의 이상과 표준을 새롭게 제시한다든가 북방으로 확대하는 제국의 전진 기지를 건설한다는 염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화성에도 그러한 염원이 담겨져 있었다. 그곳은 조선이라는 오랜 나라를 새롭게 부흥하려는 정조의 개혁 구상을 실현하는 공간이었다. 오늘날의 수원이 정조의 그러한 꿈을 저버리지 않는 한 수원은 앞으로도 지금보다 더욱 살기 좋은 미래의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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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기획 의도 ························································· 7
제1장 베르사유 성과 시의 이중주·····································11
제1절 머리말 ··················································13
제2절 왜 베르사유인가? ·······································14
제3절 새로운 우주의 탄생 ······································20
1. 베르사유 성: 절대군주의 정치성명서 ·························20
2. 베르사유 시: 성에 종속된 운명 ·····························30
제4절 신도시의 인구변화와 산업 ·································36
제5절 성과의 줄다리기 ·········································41
제6절 맺음말 ··················································47
제2장 러시아의 왕도 페테르부르크의 건설과 그 의미····················49
제1절 머리말 ··················································51
제2절 페테르부르크 건설의 배경 ·································52
제3절 페테르부르크 도시 건설과 공간 구조 ·······················58
제4절 페테르부르크 건설의 의미 ·································66
제5절 맺음말 ··················································75
제3장 청제국 북방의 정치중심지 승덕·································77
제1절 머리말 ··················································79
제2절 승덕 피서산장의 설립 목적과 배경 ·························81
1. 만주족의 전투력 유지 ······································83
2. 몽고 지배의 근거지 ········································87
제3절 피서산장과 정치중심지 승덕 ·······························94
제4절 건륭기 승덕의 발전 –외팔묘와 도시의 형성- ··············· 104
제5절 맺음말 ·················································120
제4장 정조의 수원 화성 건설과 양경(兩京) 구상······················· 123
제1절 서론 ···················································125
제2절 정조대의 시대 상황과 수원 화성 건설의 정치적 목적 ·······127
제3절 수원 화성의 도시 위상과 건설 이념 ······················130
1. 수원 화성의 위상 - 양경 체제를 목표로 한 별경(別京) ········130
2. 별경의 도시 이념 - 정치·경제 개혁의 모범 지역 ···········137
제4절 화성 신도시의 공간 구성과 건축물의 특징 ·················144
제5절 정조 사후 화성 신도시의 쇠퇴와 그 의미 ···················155
제6절 결론 : 수원과 관련된 시사점 ·····························157
제5장 신도시 건설의 맥락과 수원 화성의 위상························159
제1절 서언 ···················································161
제2절 도시와 신도시 ···········································161
제3절 신도시 건설의 보편적 논리, 격자형 계획이론 ···············169
제4절 수원 화성 신도시의 성격과 위상 ··························179
제5절 맺음말 ·················································186
총 결 ························································ 189
참고문헌 ························································ 195